본문 바로가기

일기

지겨운 입시, 장민호에게서 배운 것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선 그래도 할 일을 했었는데.. 근래 피로감이 심한 탓인지 그마저도 하지 않고 있다.
그냥 소소한 낙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 때문일까.
10년은 보지 않던 티비를 근래 들어 자주 들여다보고 있다. 함께 살고 있는 분들이 티비를 좋아하는 까닭이다. 집 티비에는 임영웅, 영탁, 정동원, 장민호, 김희재, 이찬원.. 그렇다, 이른바 미스터트롯의 탑6.. 그들이 자주 출몰한다. 연예인에 통 관심이 없는 나지만 매주 2회 이상 그들의 현란한 노래 실력을 감상하게 되니 자연히 조금의 정이 들었다. 물론 팬이 될 만큼은 아니다. 그들의 매력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그냥 내 성향 탓이다. 아직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열렬한 팬이 되어 본 적은 없다. 좋아해서 잘 될 관계-지인 이상-가 아니라면 애정을 쏟아붓는 게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밑빠진 독에 물 붓기는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다.


탑6 모두 각각의 매력이 있지만 일단 오늘은 장민호에 대한 기록을 잠깐 남기고 싶다.
왜인지 자상한 외삼촌 둘의 얼굴이 자꾸만 교대로 스쳐 지나가서 처음부터 미워하기 어려운 얼굴이란 생각은 들었던 사람이다. 그 웃는 얼굴에서, 짙은 쌍꺼풀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선연한 눈가의 주름에서 자꾸만 외삼촌들의 얼굴이 보여 눈에 밟혔던 아저씨. 팬심이라기엔 좀 그렇고.. 마음껏 나래 펼치는 삼촌을 보듯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유독 이 삼촌같은 아저씨가 자꾸 눈에 밟혔던 이유를 어제서야 알았다.
윤흥길의 장마 말미에 '정말 지루했던 장마였다.'란 대목이 있는데, 나는 여기서의 '정말 지루한 장마'가 내 기나긴 입시처럼 느껴졌다.


나의 이십대, 내 이십대는 그 전반을 입시에 저당잡힌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3때는 원하던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재수 후에도 역시 그랬다. 모두가 알지만 누구나 다니고 싶어 하는 대학은 절대 아닐 모 대학에 다니면서도 계속 만족하지 못했다. 나는 어쩌면 대학에 다니는 내내 결말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입시를 다시 치르게 될 거란 거. 이 바닥에 다시 내팽개쳐지는 삶을 살게 될 거란 거.


아무 것도 모를 때에는 최상위권만 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최상위권이 되고도 반쯤은 혹은 반 이상은 내 잘못일 원서 영역에서의 참패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하다하다 예비 한자리수를 네 개 이상 보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고배가 한 잔이라면 돌이킬 수 있었겠지만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연거푸 마신 고배는 쓰다 못해 사약에 가까웠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나의 존재는 지워지고 나는 말 그대로 유령인간으로 전락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친구와 입버릇처럼 농으로 뱉던 '잉여'가 이제는 더이상 농이 아니게 되었다. 유령은 잉여다. 어쩌면 내게는 잉여란 단어조차도 과찬일는지 모른다. 가세는 예전과 같지 않은데, 나는 집의 재산을 축내고 있으니.


어쨌거나 입시가 길어진 까닭일까. 장민호는 대단해 보인다.
한 우물만 파는 것도 한 우물에서 물이 솟을 기미가 보여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명에 가까운 세월을 22년이나 견딘 장민호는 진심으로 대단해 보인다. 누구는 고작 몇 년이라고 내게 이야기할지 모르겠지만 고되게 살아 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쉬이 입에 담지는 않을 것이다. 제3자의 시선에서 '몇 년'은 단어 하나로 치환되지만 당사자의 삶에서 몇 년은 무척이나 고되고 긴 여정이다.


아침 5시 알람에 눈을 뜨자마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던 날들도 있었다. 가뜩이나 고된 하루를 5시부터 시작하자니 시작부터 숨이 턱턱 막혔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이 시간이 이렇게나 고될 줄이야. 누군가는 즐거우면 힘든 것도 모른다던데, 내겐 즐거움과 힘듦은 별개의 문제였다. 공부하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도 물론 있었지만 힘듦은 힘듦이었다. 장민호의 삶을 내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22년 중 그런 시간들이 그에겐 없었을까. 솟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물줄기, 파면 팔수록 깊어지는 우물 그리고 아득해지는 평지의 빛. 이미 너무 내려와서 올라가기엔 이제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 매몰비용이라 생각하고 다 버리자니 그래도 사랑하는 일이고 돈이야 버릴 수 있다지만 삶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서 오는 딜레마...


차마 다 적기에도 벅찬 그 여정을 22년간 지속해온 장민호의 열정과 의지를 생각하면 여러 감정들로 마음이 복잡하다. 힘든 시간들을 보냈을지도 모를 사람에 대한 동병상련, 그 시간을 버텨낸 사람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나의 시선. 나는 이 가시밭길을 얼마나 헤쳐내야 빛을 볼 수 있을까. 이 우물을 도대체 얼마나 파내야 물줄기에 닿을 수 있을까.


이번 입시 결과마저도 원하던대로 되지 않으면 이제는 일을 해서 돈을 모아 다시 입시 준비를 해야 하나 싶고, 그러면 또 사회인이 되는 시기는 저만치 멀어질 것 같아 두려움은 배가된다. 얼마나 간절하고 얼마나 절실해야 이 입시의 끝을 볼 수 있을까. 가끔은 게이머들 사이에서 언급되곤 하는 '리세마라'란 게 내 삶에도 적용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한 우물만 오래 팠던 사람들은 이런 시간들도 견뎌 냈었을 것이라 맘을 다독이기엔 너무 병든 육체에 깃든 혼이지만... 별 수 없겠다. 그래도 끝을 봐야지.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